쇳물이 식어간다···철강기업마저 ‘코리아 엑소더스’

중견 철강 업체, 美 통상 압박에 존폐 기로···수출·내수 적신호에 제조업 고전 이재영 기자l승인2018.05.08l수정2018.05.10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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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코 광양제철소의 용광로에서 쇳물을 생산해내고 있다. 사진=뉴시스

[비즈넷타임스=이재영 기자] 미국발 통상 압력에 견디다 못한 중견 철강 업체들이 국내 생산을 포기하고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고 있다. 그동안 각종 규제와 노사 문제 등으로 해외로 공장을 옮겨온 우리 기업들에 통상 장벽까지 더해지며 '코리아 엑소더스(탈한국)'도 가속화하고 있다. 철강 업체뿐만이 아니다. 우리 제조업의 축소판이라 평가받는 한국 자동차 산업 역시 노동 생산성은 떨어지고, 기업 규제 강화 등으로 내부 여건은 악화했다. IT(정보기술) 기업의 약진이 뚜렷한 가운데 그동안 국내 산업계를 이끌어온 제조업의 성장이 한계를 맞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美 ‘쿼터’ 압박에 中 ‘맹추격’까지···공장 해외 이전 계획세우는 철강업계

경북 포항시 철강산업단지에 있는 중견 철강회사 넥스틸 제1 공장은 지난 2014년만 해도 24시간 가동되며 연간 56만t의 강관을 만들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3개 라인 중 하나는 생산을 아예 멈췄다. 나머지 2개 라인도 생산 물량 조절을 위해 잔업과 특근을 없앤 상태였다. 2014년 말 500명이 넘던 전체 직원은 200명 초반까지 줄었다. 김이용 넥스틸 생산본부장은 "올해 500억원 정도 들여 공장을 미국으로 옮길 예정"이라고 했다. 지난해 영업이익(200억원)의 2.5배에 달하는 돈을 들여 공장을 이전하는 건 미국의 통상 압력 탓이다.

넥스틸은 포스코로부터 열연 강판을 공급받아 이를 강관으로 가공하는 업체다. 원유나 셰일가스 시추에 쓰이는 유정용 강관(OCTG)이 주력 제품이다. 유정용 강관은 국내엔 수요가 거의 없어 대부분 북미 지역으로 수출해왔다. 박효정 넥스틸 대표는 "중소기업이 죽을 힘을 다해 세계 수준의 기술력을 만들어 놓았지만 미국 통상 압박에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물량 대부분을 미국으로 수출했는데 '쿼터(수출 물량) 제한'에 '관세 폭탄'까지 때리니 사업을 접으라는 얘기"라고 했다.

우리 정부는 최근 한·미 FTA 개정 협상에서 미국의 25% 철강 추가 관세 조치를 면제받는 대신 2015~2017년 평균 수출량의 70%에 해당하는 쿼터를 설정하기로 합의했다. 넥스틸의 강관 수출은 반 토막이 나게 된다. 여기에 미국 상무부는 넥스틸이 반덤핑 조사 과정에 자료 제출을 성실히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75.81%의 반덤핑 관세까지 부과했다.

강관 회사인 세아제강은 2016년 미국 휴스턴 지역에 현지 생산 체제를 갖췄다. 유정용 강관 생산 설비와 후처리 설비를 인수해 연산 15만t의 세아스틸 USA 생산법인을 세웠고, 지난해 6월부터 생산을 시작했다. 최근에는 튜빙(유정용 강관을 생산하기 위한 이전 단계 제품) 공장도 추가로 건설하기로 했다. 업계 관계자는 "세아제강의 대미 수출 비중은 전체 수출의 약 70%에 달한다"며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통상 압박은 회사 존폐와 직결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세아제강은 미국 공장 인수로 국내 인력 감축은 없다는 입장이지만 2016년 863명이었던 직원은 작년 말 733명으로 130명(15%) 줄었다.

대형 철강사들도 중국·인도 등 신흥 철강 강국의 맹추격에 미국 통상 압력까지 더해지면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다. 세계 1위였던 포스코는 5위로 떨어졌고, 국내 2위 현대제철은 영업이익이 2014년을 정점으로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다. 2015년 워크아웃에 들어간 업계 5위 동부제철은 아직도 주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민동준 연세대 신소재공학부 교수는 "한때 한국 산업계의 자랑이었던 철강이 살기 위해선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과 산업 전반의 체질을 강화하는 근본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변압기 생산 회사인 현대일렉트릭은 지난달 15일 미국 앨라배마 공장을 인수하고, 350억원을 추가로 투자하기로 했다. 2011년부터 매년 반복되어온 변압기에 대한 반덤핑 관세가 올해 60.81%까지 높아지자 내놓은 조치다. 지난 1월 미 정부가 한국산 세탁기에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발동하자 국내 가전업체들은 비상이 걸렸다. LG는 미국 테네시주 클락스빌에 2019년 1분기까지 완공 계획이던 공장을 올 연말까지로 앞당기고, 삼성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뉴베리카운티에 새로 지은 가전 공장 조기 가동에 들어갔다.

▲ 사진=뉴시스

제조업 강국에서 내려오는 韓···자동차 수출까지 흔들

2010년대 들어 자산 5조원 이상 대기업 집단에 진입한 국내 기업 중 전통 제조업은 한 곳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정거래위원회가 2010년 이후 발표한 자산 5조원 이상 대기업 현황(공기업 제외)을 보면 대기업으로 신규 지정된 10개 대기업 그룹 가운데 카카오·네이버·넥슨·넷마블 등 인터넷·게임 분야는 4곳, 중흥건설·호반건설·SM(옛 우방) 등 건설 분야는 3곳으로 집계됐다. 나머지 3개사는 닭고기로 유명한 하림을 비롯해 도시가스 기업 삼천리, 바이오기업 셀트리온이다.

인터넷과 게임 업계에서는 2016년 카카오를 시작으로 2017년 네이버·넥슨, 2018년 넷마블 등 해마다 신규 대기업 집단을 배출하고 있다. 이와 함께 카카오 김범수 의장, 네이버 이해진 창업자, 넷마블 방준혁 의장은 벤처기업인에서 대기업 그룹 총수로 지정됐다. 국내 게임 업계 '빅3' 중 하나인 엔씨소프트도 수년 내에 합류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엔씨소프트는 지난해 1년 동안 자산을 1조원 이상 불리며 3조5000억원대를 기록했다.

자산 기준 20위 내 상위권에서도 2010년대 들어 전통 제조업의 부진은 두드러졌다. 이들이 사라진 자리는 유통·건설·금융 등 비제조업이 차지했다. 조선업이 불황을 맞으면서 STX는 그룹이 해체됐고, 대우조선해양도 올해 20위 밖으로 밀렸다. 반면 2010년 22위였던 유통 대기업 신세계는 올해 농협과 현대중공업에 이어 11위에 올랐고 미래에셋은 올해 처음 20위권에 들었다.

한국 자동차 업계는 국내외 판매 부진, 중국의 추격, 고비용·저효율 구조, 환율 하락 등 7중(重)의 위기에 처했다. 전·후방 관련 산업이 가장 많은 자동차는 제조업 생산의 14%, 부가가치의 11.5%, 고용의 12.2%를 담당하고 있다. 올 1분기 매출·영업이익·순이익·판매량이 동시에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미국과 중국 시장 점유율은 매년 떨어지고, 내수시장에선 수입차 공세에 밀리고 있다.

한국 자동차 산업의 고비용·저효율 구조는 더욱 고착화했다. 자동차 한 대를 생산하는 데 한국은 평균 26.8시간(2015년)이 걸려 GM(21.3시간), 도요타(24.1시간)보다 길다. 반면 이미 경쟁사를 추월한 임금은 통상임금 확대, 최저임금 인상까지 더해졌다. 최악의 위기 속에서도 노조는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연례화하고 있다.

일본 완성차 업체 도요타는 지난해(2017년 4월~2018년 3월) 전년보다 10% 가까이 늘어난 2조1890억엔(약 21조원)의 사상 최대 영업이익이 예상된다. 품질 경쟁력 회복과 엔화 약세 덕분에 수출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일본 자동차 수출은 2014년 383만 대에서 작년 421만 대로 10% 가까이 늘었다. 반면 한국 자동차 수출은 292만 대에서 242만 대로 17% 줄었다.

현대차는 작년 4조6000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둬 2010년 이후 가장 저조했다. 올 들어 4월까지 도요타는 미국 시장에서 판매를 4.1% 늘렸지만, 현대차는 11.6% 줄었다. 일본은 자동차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2007년 이후 세 곳에 공장을 새로 만들었지만 한국은 1997년 이후 공장을 한 곳도 짓지 않았다. 현대경제연구원 주원 이사는 "미래 신산업에 환상을 두지 말고, 현재 주력 산업 위기를 직시해야 한다"며 "경제정책에 대한 리부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재영 기자  news@biznet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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